삼국 통일
목차
- 당나라의 등장
- 1차 나당연합
- 2차 나당연합
- 백제의 멸망
- 고구려의 멸망
- 나당전쟁
1. 당나라의 등장
우리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기니, 그것은 바로 당의 통일(618)입니다.
중국이 다시 통일되어 전운이 감도니.. 당과 신라의 가로동맹과 돌궐-고구려-백제-일본의 세로동맹이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중국의 황제는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당 태종 이세민!
과연 한반도 국가들의 운명은..?
2. 1차 나당연합
『삼국사기』의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동맹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당나라는 의지가 충만하고, 신라의 도움 없이 고구려를 꺾을려고 해요.
그래도 사신이 왔으니 그냥 보내기는 좀 그래서 조건을 주니
- 군사를 빌려주지만 오래 빌려주기는 어려움
- 당나라 군복을 줄 테니 그거 입고 싸우는게 어떰?
- 아니면 너네 왕 여자니까 우리 가문 남자 하나 보내서 결혼시켜서 왕 만드셈
음, 당연하게도 신라 사신을 놀리는 거에요, 군사를 지원해 줄 생각이 없다는거죠. 이때가 643년 9월입니다.
이어서 644년 겨울, 당나라 군대 80만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니 1차 고당전쟁입니다.
당나라 군대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의 비사성, 건안성, 현도성을 공격합니다.
이적의 당군 6만은 현도성을 5월 5일에 함락시키고, 이어서 신성을 공략하지만 여의치 않자 기동전을 벌여 5월 26일에 개모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합니다.
이어서 남쪽 방향으로는 장검이 6만을 이끌고 건안성을 공략하지만, 건안성은 함락되지 않습니다.
해로를 통해 장량(張亮)이 당의 수군을 이끌고 공략하자 비사성(卑沙城)은 645년 5월 31일에 당군에게 함락되고, 고구려의 방어선에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고구려는 이에 맞서 4만의 군대를 신성과 국내성에서 차출해 요동성으로 파견하고,
이어서 선봉대인 이적 군대와 당 태종의 친정군이 고구려 방어선의 최대 성, 요동성에 도달하니..
이때가 645년 5월 29일입니다.
당군은 고구려 지원군의 증원을 방어하고, 이어서 645년 6월 8일부터 시작해 이세적의 지휘 아래 12일간 밤낮없이 요동성을 공격합니다.
마침내, 645년 6월 17일, 요동성이 당나라에 함락되고 이어서 남쪽의 백암성(白巖城)을 향해 공세를 개시합니다.
고구려는 백암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골성(烏骨城)의 고구려군 1만을 증원으로 보내지만, 백암성의 내분으로 인해 결국 645년 7월 1일, 백암성마저 당군의 수중에 넘어가면서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의 중심이 그대로 붕괴하게 됩니다.
당군은 요동방어선의 중심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남쪽의 안시성-건안성과 북쪽의 신성은 건재했습니다.
하지만 신성은 굳건했고, 건안성(建安城) 방향을 공격하던 장검의 군대가 패퇴하며 고구려는 방어에 성공합니다.
당 태종은 그대로 고구려를 공격해서 오골성(烏骨城)을 함락시키고자 했지만 안시성의 위협을 걷어내기 위해 안시성을 먼저 공격하게 됩니다.
당군은 건안성과 신성에서 퇴각한 뒤 요동성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당태종의 당군이 직접 남하해 안시성 부근까지 진격합니다.
고구려는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15만의 병력을 요동 방향으로 파견하고, 마침내 645년 7월 22일, 주필산에서 대회전이 벌어지니 주필산 전투입니다.
당군이 이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안시성을 645년 9월 10일부터 공격한 것을 보면 당군의 피해 또한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 태종은 몇달간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해 보지만 안시성의 방어에 막혀 실패하고, 결국 645년 10월 21일에 겨울이 찾아오자 퇴각하게 됩니다.
당나라군의 퇴각 과정이 이상한 것을 보면, 고구려군이 안시성의 방어 도중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방어선의 성을 수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건 조선 후기에 등장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아요.
이 극적인 승전은 오히려 중국에서 더 띄워주게 된답니다.
이후 647년, 당은 고구려를 한 차례 더 침공하니 2차 고당전쟁입니다.
이때 당군은 요동 방어선을 약탈하고, 압록강을 따라 박작성 등을 공격하지만 실패합니다.
결국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동맹국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당은, 이때 찾아온 신라 사신(김춘추, 648)을 만나 동맹을 맺으니, 1차 나당연합입니다.
근데 649년 당 태종이 사망하면서 1차 나당연합은 파탄나게 됩니다.
3. 2차 나당연합
이후 즉위한 당 고종은 신라와 다시 한번 동맹을 맺으니, 2차 나당연합입니다.
하지만 신라와 당은 서로 목적이 달랐어요.
신라와 당 둘 다 한반도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지만, 방향성은 조금 다르죠.
당은 당 휘하에 쪼개진 3개 국가를 두어 자신의 영향권 내에 두려고 했고, 신라는 반대급부로 3개 국가를 점령해 자신의 힘으로 만들고자 했어요.
당군은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공격해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웅진성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킵니다.
4. 백제의 멸망
660년, 백제가 멸망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백제 의자왕이 항복했다고 나옵니다.
아쉽게도 삼천궁녀 설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아요. 궁녀가 삼천이면 그거 무장시켜도 잘 싸울텐데..
반대로 구당서/신당서의 소정방전에는 예식이라는 사람이 의자왕을 끌고 나와 항복했다고 나오는데, 이게 현재로써는 정설이에요.
이유는 예식진 묘비명(골동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이후 웅진(현 공주)에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세워지지만, 아직 백제 각 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요.
백제의 잔여 세력들이 남잠성, 정현성, 임존성 등에서 항전하는데.
하지만 백제 세력의 내분(복신,도침,부여풍의 암살 모략)으로 몰락하고..
이후 신라는 문무왕이 즉위하고(661), 당은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합니다(663)
이후 당군과 신라군이 다시 한번 연합해 쳐들어오자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이 멸망하면서 그 끝을 맞이합니다.
당은 한반도의 각 국가에 도독부를 설치해 한반도를 예속시키려고 했어요.
그래서 신라 왕을 계림도독이라 부르게 됩니다.
백제 왕을 웅진도독이라고 부르는 것 처럼요.
신라는 망한 백제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화나지만 참고 있어요.
이후 664년에 웅령 회맹이, 665년의 취리산 회맹으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記)』 7권 문무왕전의 하편을 보면...
十一年春正月, 拜伊湌<禮元>爲中侍. 發兵侵<百濟>, 戰於<熊津>南, 幢主<夫果>死之. <靺鞨>兵來圍<舌口城>, 不克將退, 出兵擊之, 斬殺三百餘人. 聞<唐>兵欲來救<百濟>, 遣大阿湌<眞公>․阿湌▣▣▣▣兵守<甕浦>. 白魚躍入▣▣▣▣▣▣▣▣▣▣一寸. 夏四月, 震<興輪寺>南門. 六月, 遣將軍<竹旨>等, 領兵踐<百濟><加林城>禾, 遂與<唐>兵戰於<石城>, 斬首五千三百級, 獲<百濟>將軍二人, <唐>果毅六人. 秋七月二十六日, <大唐>摠管<薛仁貴>使<琳潤>法師寄書曰: 『行軍摠管<薛仁貴>致書<新羅>王. 淸風萬里, 大海三千, 天命有期, 行遵此境. 奉承機心稍動, 窮武邊城, 去<由也>之片言, 失<侯生>之一諾. 兄爲逆首, 弟作忠臣, 遠分花萼之陰, 空照相思之月, 興言彼此, 良增歎詠. 先王
<開府>, 謀猷一國, 展轉百城, 西畏<百濟>之侵
출처 : 다빈치
흠,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1년(서기 671) 봄 정월, 이찬 예원(禮元)을 중시로 임명함. 백제를 침공하여 웅진 남쪽에서 전투를 벌였고, **병장 부과(夫果)**가 전사함. 말갈(靺鞨) 군이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했으나 이를 뚫지 못하고 퇴각함. 그 후 군을 출동시켜 말갈 군을 격퇴하고 300여 명을 처치함.
당나라 군이 백제를 구출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아찬 진공(眞公)**과 아찬 등이 **병력을 보내 네임포(甕浦)**에서 방어함. 여름 4월, 흥륜사 남문에서 진동이 일어났음. 6월, 장군竹旨가 병력을 이끌고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을 공격하며, 당나라 군과 **석성(石城)**에서 전투를 벌였고, 5,300여 명을 처치하고 백제의 장군 2명을 포로로 잡음.
7월 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신라 왕에게 서신을 보내며 다음과 같이 전함: "맑은 바람은 만 리를 날리고, 바다는 삼천 리를 넘어갑니다. 하늘의 명은 반드시 때가 있고, 그 명에 따라 이 땅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께서는 변방을 공격하고 약속을 저버리셨습니다. 형은 반역의 우두머리가 되고, 동생은 충신이 되어 과거의 그늘을 떠났습니다. 선왕께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나라를 지켰으나, 왕은 그 뜻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가의 안정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보면 멸망한 백제가 멀쩡하고 오히려 당군에게 지원을 받았으며, 당나라가 백제랑 싸우지 말라고 합니다.
즉, 백제는 멸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나라의 속국이 되어서 국가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당나라는 백제 영토를 신라에게 넘겨줄 의지가 없음 또한 드러나고 있죠.
5.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와 나당의 전쟁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요. 622년부터 655년까지...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상상 이상의 저력을 발휘해 사수대첩에서의 대승으로 당군을 갈아마시지만,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 자식 3명이서 서로 내분이 일어나고,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합니다.
이후 당은 옛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세우니,『신당서(新唐書)』148권『동이열전(東夷列傳)』 22문단을 보면
男建以兵五萬襲扶餘,勣破之薩賀水上,斬首五千級,俘口三萬,器械牛馬稱之。進拔大行城。劉仁願與勣會,後期,召還當誅,赦流姚州。契苾何力會勣軍於鴨淥,拔辱夷城,悉師圍平壤。九月,藏遣男產率首領百人樹素幡降,且請入朝,勣以禮見。而男建猶固守,出戰數北。大將浮屠信誠遣諜約內應。五日,闔啟,兵噪而入,火其門,鬱焰四興,男建窘急,自刺不殊。執藏、男建等,收凡五部百七十六城,戶六十九萬。詔勣便道獻俘昭陵,凱而還。十二月,帝坐含元殿,引見勣等,數俘於廷。以藏素脅制,赦為司平太常伯,男產司宰少卿;投男建黔州,百濟王扶餘隆嶺外;以獻誠為司衛卿,信誠為銀青光祿大夫,男生右衛大將軍,何力行左衛大將軍,勣兼太子太師,仁貴威衛大將軍。剖其地為都督府者九,州四十二,縣百。復置安東都護府,擢酋豪有功者授都督、刺史、令,與華官參治。仁貴為都護,總兵鎮之。是歲郊祭,以高麗平,謝成於天。
출처 : 다빈치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아요.
남건은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扶餘)**를 공격했습니다. **설인귀(勣)**는 이를 물리쳐 **사하수(薩賀水)**에서 고구려 군을 격파하고, 5천 명의 적을 처치하고 3만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또한, 많은 무기와 소, 말도 약탈했습니다. 설인귀는 **대행성(大行城)**을 점령했습니다.
**유인원(劉仁願)**은 설인귀와 군을 합치기로 했으나, 후에 약속을 어기고, 설인귀를 다시 불러들여 처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설인귀는 이를 용서하고, 姚州로 유배시키며 면죄를 주었습니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은 설인귀와 군을 합쳐 鸭淥에서 고구려의 **욕이성(辱夷城)**을 점령하고, **평양(平壤)**을 포위했습니다. 9월, **장(藏)**은 남산의 남산을 이끌고 백인 100명을 보내 백성과 함께 항복하고, 입조를 요청했습니다. 설인귀는 이를 예로 대접했습니다.
남건은 여전히 고구려의 수도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북쪽으로 여러 차례 출정했습니다. 대장군 **부도 신정(浮屠信誠)**은 내부 협력을 위해 스파이를 보내고, 5일 후에 성문을 열고 군이 침입해 불을 지르며 남건은 절박해져 스스로 자결했습니다.
설인귀는 장(藏), 남건 등을 잡아, 5부 176개의 성, 69만 호를 정복했습니다. 황제는 설인귀에게 승리를 보고하고, 포로를 황제의 무덤(昭陵)에 바치게 했습니다.
12월, 황제는 설인귀와 함께 **빈전(含元殿)**에서 만나,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여러 포로를 공개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또한, **장(藏)**은 **위위경(衛尉卿)**으로, 남산은 **정기 대제(司平太常伯)**로 복권되고, 남건은 귀양지로 유배되었으며, 설인귀는 우위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설인귀는 고구려의 영토를 나누어 9개의 도독부, 42개의 주, 100개의 현을 설치하고, 안동도호부를 다시 설치하여 군사와 민정을 통합하게 했습니다. 설인귀는 안동도호부의 도독으로 임명되어 군을 통솔하며 고구려 정복을 완료했습니다. 이 해에 고구려의 정복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냈으며, 이를 통해 하늘에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6. 나당전쟁
당은 한반도 땅에 3개의 도호부를 설치해 예속화하려했지만, 신라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요.
백제가 올려놓은 웅진도독 부여풍을 박살내는 동시에, 고구려 잔존 세력과 동맹을 맺어 당을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초기의 기세는 강력해서, 고구려의 남아있는 안시성, 국내성 등이 호응하고 평양성과 오골성을 점령하고 전진하지만..
당군의 맹공에 고구려의 각 성이 무너지고 전선은 대동강까지 밀렸어요.
이에 신라는 어떻게든 당군의 공세를 좀 늦추고, 대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해 방어를 시도합니다.
이후 옛 백제 지역에 소부리주가 설치되고,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승전하니, 삼한일통의 성공입니다.
『신당서(新唐書)』148권『동이열전(東夷列傳)』24문단을 보면 안동도호부 또한 철수합니다.
儀鳳二年,授藏遼東都督,封朝鮮郡王,還遼東以安餘民,先編僑內州者皆原遣,徙安東都護府於新城。藏與靺鞨謀反,未及發,召還放邛州,廝其人於河南、隴右,弱窶者留安東。藏以永淳初死,贈衛尉卿,葬頡利墓左,樹碑其阡。舊城往往入新羅,遺人散奔突厥、靺鞨,由是高氏君長皆絕。垂拱中,以藏孫寶元為朝鮮郡王。聖歷初,進左鷹揚衛大將軍,更封忠誠國王,使統安東舊部,不行。明年,以藏子德武為安東都督,後稍自國。至元和末,遣使者獻樂工云。
출처 : 다빈치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아요.
의봉 2년, **장(藏)**은 요동도독에 임명되었고, 조선군왕에 봉해졌습니다. 그는 요동으로 돌아가 민심을 안정시키고, 이전에 내주에 이주했던 사람들을 원래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장은 **말갈(靺鞨)**과 반란을 꾀했지만,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장은 경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 사람들은 하남과 롱위(隴右) 지역에 살게 되었으며,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동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장은 영순 초기에 사망했으며, 그의 공로로 위위경에 추증되었고, 그의 묘는 갈리(頡利)의 묘 좌측에 묻히고, 그 묘비도 세워졌습니다. 고대의 성은 종종 신라와 연결되었으며, 일부 사람들은 **돌궐(突厥)**이나 말갈로 도망쳤습니다. 이로 인해 고씨 가문의 왕권이 단절되었습니다.
최후의 고구려 왕은 장의 손자 보원이었으며, 그는 조선군왕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성력 초기에 그는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진급했고, 충성국왕으로 다시 봉해졌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안동의 옛 부대를 통솔하는 임무는 결국 수행되지 않았습니다.
내년에는 장의 아들 덕무가 안동도독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원화 말기에는 사절이 음악과 장인을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사실 신라가 이긴 건 타이밍도 있었는데, 토번이랑 당이 대립중이었는데 중간에 토욕혼이 막고 있어서 그러지 못하다가,
토번이 토욕혼을 밀어버리고 토번-당 전쟁이 발발(대비천 전투)로 인해 한반도에 투입한 전력을 토번 방향으로 돌릴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당군은 토번군에게 패해 실크로드를 상실하고, 안동도호부도 발해에게 밀려나니..
글세요, 당은 병력만 날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