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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한국사

고조선

by 길냥이 2025.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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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고조선의 분류
  2. 기자조선
  3. 위만조선
  4. 고조선의 역사

 

1. 고조선의 분류

그러니까.. 단군신화 편의 마지막에서

마지막으로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고조선'은 우리 역사학계에서 편의상 붙이는 거고, 그냥 '조선'이라고 부르는 게 맞습니다. 
단지 우리가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위만이 찬탈한 '위만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자를 붙이는 것일 뿐이죠.

 

라고 하던데요, 그럼 "위만조선"은 또 뭔가요?

 

으음.. 일단 고조선의 역사는 세 파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화시대의 단군조선

중국사의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조선까지

 

단군신화는 신화 말고는 기록이 없어요, 모른다는겁니다. 

하지만 저 멀리 대륙의 중국은 과거부터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기에, 여기서 사료를 긁어와서 우리나라 고고학과 대조해보는데.. 

이게 웬걸? 중국의 역사서에 고조선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고조선이 둘인데,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위만조선입니다.

 

2. 기자조선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중국의 춘추시대와 시기가 겹쳐 기자(箕子)에 대한 기록에 조선이 기록되어 있고,

위만조선은 중국의 전한시대와 시기가 겹쳐 이민족과 관련된 기록에 조선이 있죠.

주(周)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참조 : 우리역사넷

 

『상서대전(尙書大全)』에도 기록이 남아있다는데.. 원문을 못찾겠습니다.

그래서 『상서(尙書)』의 17권의 전문을 뒤져봤는데 역시 안나오더군요.

제가 못찾은거라면 여기 답글 좀..

 

흠, 상서대전에서 못 찾았으니 다른거에서 한번 끌어와 봅시다.

오현수 교수님의 논문 "箕子傳承의 형성과정 연구" 에서 끌어와 보죠..

武王은 箕子가 감옥에 갇힌 것을 풀어주었다. 箕子는 周나라의 (武王이 자신을) 풀어준 것을 차마 받들 수 없 어서 朝鮮으로 갔다. 武王이 이 소식을 듣고 箕子를 朝鮮에 봉하였다. 箕子는 周나라의 봉함을 받고 부득이 신하의 예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武王 12년에 (武王)을 찾아뵈었다. 武王은 箕子가 朝謁한 것을 기회로 洪範 을 물었다.

흠, 좀 더 찾아 볼까요.

 

유명한 역사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사기세가(史記世家)』 의 8권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기자와 조선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데..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출처 : 다빈치

음, 짧아서 좋네요.

 

해석해 드리자면..

"이때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그가 더 이상 주나라에 속하지 않도록 하였다."

입니다.

흠, 봉하다는 뜻은 작위를 준다는 건데, 주나라에 속하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그럼 다른 자료를 가져와 볼까요..

 

이번에는 『한서』에서 찾아보죠. 『한서』에도 기자의 대목이 있었으니..

『한서 지(漢書 志)』 의 8권 『지리지(地理志)』 의 173번째 문단에..

玄菟、樂浪,武帝時置,皆朝鮮、濊貉、句驪蠻夷。殷道衰,箕子去之朝鮮,教其民以禮義,田蠶織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相殺以當時償殺;相傷以穀償;相盜者男沒入為其家奴,女子為婢,欲自贖者,人五十萬。雖免為民,俗猶羞之,嫁取無所讎,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貞信不淫辟。其田民飲食以籩豆,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往往以杯器食。郡初取吏於遼東,吏見民無閉臧,及賈人往者,夜則為盜,俗稍益薄。今於犯禁浸多,至六十餘條。可貴哉,仁賢之化也!然東夷天性柔順,異於三方之外,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以歲時來獻見云。

출처 : 다빈치

라는 문단이 존재합니다.

 

아, 해석해 드리자면

"玄菟(현토)와 樂浪(낙랑)은 모두 무제(漢 무제) 때 설치된 군현으로, 그 지역은 모두 조선, 예맥, 구려(句驪) 등 야만족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은나라의 도덕이 쇠퇴하고,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예의와 의리를 가르쳤으며, 그들에게 농업과 비단을 짜는 법을 가르쳤다. 낙랑의 조선 사람들은 여덟 가지 금법을 지켰다: 서로를 죽이면 당시의 법으로 그에 대한 보복을 했다;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물로 보상했다; 서로 도둑질을 하면 남자는 집의 노예로, 여자는 여종이 되었으며, 스스로 값을 치러서 풀려나려면 50만을 지불해야 했다. 비록 이들이 풀려나면 민중으로 돌아갔으나, 그들의 풍습은 여전히 그들을 부끄럽게 여겼고, 결혼 시 원수를 갚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끝까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았고, 문과 문이 닫히지 않았으며, 여성들은 정직하고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농사와 음식은 주로 조와 콩으로 이루어졌으며, 수도에는 고위 관리와 지방 상인들이 있었고, 이들이 자주 잔을 들고 음식을 나누었다. 처음에 낙랑 군에서 관리가 요동에서 선발되었는데, 그 관리들이 민간인을 보았을 때 그들의 집에 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상인들이 그곳에 가면 밤에 도둑이 되었고, 그들의 풍습은 점차 더 부패해 갔다. 지금은 금법을 어기는 일이 점점 많아져서, 그 금법의 조항이 60개를 넘었다. 이것은 정말로 귀한 일이었으며, 인자하고 현명한 지도자의 교화 덕분이었다! 그런데 동이족은 본래 성품이 온순하고, 삼국 외의 지역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께서 도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을 한탄하시며, 바다에 떠서 9개 이국에 살고자 하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낙랑의 바다에는 왜인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100여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고, 매년 제때에 조공을 바친다고 한다."

아.. 길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만 색칠해 드렸습니다.

뭐, 기자가 와서 조선을 다스렸다! 는 설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조선에 와서 여러가지 작업을 했다? 정도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 학계와 중국 학계가 저 부분에서 자주 다투는데.. 중국 학계는 "여덟 가지 금법(팔조법)"까지 가르쳤다는 것을 정설로 밀고 있고, 우리 학계는 "예의와 의리를 가르치고 농업과 비단을 짜는 법을 가르쳤다" 까지만 정설로 밀고 있습니다.

 

근데, 결론적으로 기자조선 자체는 부정되는 추세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저 교수님의 논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상서대전』 그 이전에 기록된 역사서에서는 기자조선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지 않아요.

 

비록 『사기』와 『한서』를 비롯한 추후 많은 역사서에 기자조선 관련 내용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상서대전(기원전 300~200년경)에 만들어진것보다 더 이전 시대에는 관련 기록이 없답니다.

 

대표적으로 『상서』, 『주역』, 『논어』, 『순자』... 등등 말이죠. 

심지어 저 오래된 역사서에 기자 (箕子)관련 내용은 전부 존재하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왜 『상서대전(尙書大全)』이후의 역사서만 관련 내용이 존재할까요?

그건 약간의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상서대전(尙書大全)』은 중국 한무제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한무제 시기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고조선이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망했습니다.

 

즉, 고조선 멸망 이후 한나라가 그 지방을 통치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쓰인 것이지요. 뭐, 일종의 식민사관입니다.

그럼 그 이후의 역사서는 뭐냐고요? 그야 이전 역사서 보고 썻겠죠.. 맨땅부터 해딩할 수는 없을거 아냐..

 

뭐, 당시 사람들도 그 일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편찬자 일연 스님도 관련 내용을 정설로 생각해서 집어넣었을 겁니다.

또한 이 내용이 단군조선 이야기의 맨 마지막에 들어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이 하나 있었으니, 기자가 오기 전에도 우리 민족은 잘 살고 있었다는 것.

 

3. 위만조선

마지막으로, 위만조선에 대해 알아봅시다.

기자조선과 다르게 위만조선은 딱히 학계에서 부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이유가 뭘까요?

왜긴요, 기자는 중국에서 책봉받아 왔고, 위만은 연나라에서 망명해 왔거든요. 

망명이 뭐에요, 도망간거지.. 

 

아무튼 위만조선 관련 자료 역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번에도  『사기(史記)』의 『사기열전(史記列傳)』 의 55권  조선열전(朝鮮列傳)』

 

에서의 자료와,... 여담으로 저 자료를 전부 끌고오기는 그렇기 때문에 5문단만 끌고왔습니다.

"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仆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距險。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即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走。將軍楊仆失其眾,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

출처 : 다빈치

 

아, 해석이 필요하신가..

“천자는 죄인을 뽑아 조선을 쳤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옛 제(齊)나라 땅으로부터 발해만〔渤海〕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에 달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우거(右渠)를 토벌하고자 요동(遼東)에서 나왔다.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遼東)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방종(放縱)하다가, 패하여 흩어지고, 다(多)는 달려서 되돌아오니,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누선장군은 옛 제나라 땅 출신의 병사 칠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險)에 도달하였다. 우거는 성(城)을 지키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꾀를 내어 누선장군을 물리치니 누선장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장군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山) 속에서 십여일을 숨었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을 구하고 거두니, 다시 갖추어졌다. 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

 

 

『삼국지( 三國志)』의 『위서(魏書)』 의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의 5번째 목차 『동이전(東夷傳) 

에서의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燕人衞滿亡命,為胡服,東度浿水,詣準降,說準求居西界,收中國亡命為朝鮮藩屏。準信寵之,拜為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衆稍多,乃詐遣人告準,言漢兵十道至,求入宿衞,遂還攻準。

출처 : 다빈치

44문단의 일부를 발췌해 왔습니다.

 

해석하자면, 

연나라 사람인 위만은 망명하여, 호복(胡服)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넌 후, 조선왕 준에게 가서 복종하였다. 위만은 준왕에게 서쪽 국경을 맡을 것을 청하고, 중국의 도망자들을 모아 조선을 방어하도록 제안하였다. 준은 그의 말을 믿고 신뢰하여 그를 박사(고조선의 작위)로 임명하고, 백리의 봉토를 주어 서쪽 국경을 지키게 했다. 위만은 도망자들을 유혹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나중에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어 준에게, 한나라 군대가 열 길로 쳐들어갔다고 말하며 돌아가 준왕을 숙위하기를 요청했다. 결국 위만은 돌아가서 준을 공격했다.

뭐, 약간 빠진 부분이 있네요.

 

좋아요, 잠깐 위만조선의 역사를 생략된 부분과 함께 요약하자면

 

1. 위만의 호복(胡服) 차림 망명

2. 준왕이 위만에게 땅과 병사를 주고 변방을 지키게 함

3.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밀어냄, 준왕은 남쪽으로 내려가 진국을 세움

4. 군사와 재물을 모아 주변을 침공하여 땅을 넓힘

 

5.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손자 우거까지 이어짐

6.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갈등

7.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전쟁

8. 우거왕 암살, 이후 성기가 항전하나 우거왕의 아들이 성기를 죽이도록 함

9. 한사군을 세움

 

정도가 이어지네요.

 

4. 고조선의 역사

뭐, 몇몇 부분에 대한 해석을 하자면

 

1. 위만의 호복(胡服) 차림 망명

이 부분은 말했죠, 위만은 도망자입니다.

 

2. 준왕이 위만에게 땅과 병사를 주고 변방을 지키게 함

위만은 망명자입니다. 도망자죠. 근데 변방이라? 심지어 나온 것도 서쪽 변방이에요.

고조선에게 서쪽 변방은 연이고, 연은 당시 춘추전국의 나라로 고조선과 적대관계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요약해드리자면, 탈북민이 와서 "제게 국경선의 땅과 병사를 주시면 북한과 싸우겠습니다" 하는 거에요. 말이 됩니까? 

뭐, 중국사에서 준왕의 멍청함을 날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게 맞을겁니다.

 

3.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밀어냄, 준왕은 남쪽으로 내려가 진국을 세움

이때 약간의 내용이 있는데, "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오고 있으니 돌아가 왕을 숙위하겠다.."

엄, 위만은 서북 변방을 맡았습니다. 최전선이죠. 근데 안 싸우고 왕을 지키겠다 하는거에요.

그리고 반동을 일으키고, 준왕은 남쪽으로 도망갑니다. 

이 파트는 나중에 진국(辰國) 으로 연결되는데..

 

4. 군사와 재물을 모아 주변을 침공하여 땅을 넓힘

5.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손자 우거까지 이어짐

위만 이후 고조선은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우거왕으로 장자승계가 이어졌습니다. 왕권강화죠.

이후 중개무역으로 성장하는데.. 사실 좋게 말하면 중개무역이고 나쁘게 말하면 삥뜯기죠. 그냥 도적질입니다.

 

6.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갈등

근데 자기네 국가로 들어오는 무역품이 자꾸 약탈당해요!

한나라가 빡칩니다.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서 우리 무역로 약탈하지 말라고 해요.

우거는 안듣습니다. 섭하가 성과 없이 돌아가면 황제에게 죽을 것이기에, 마중나온 조선군 장수를 죽여버립니다.

이번엔 고조선이 빡칩니다. 섭하를 죽여버립니다.

그랬더니 전쟁이 발발!

 

7.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전쟁

전쟁이 터집니다. 한나라는 좌장군 순체가 이끄는 5만 병력으로 육로를, 누선장군 양복 휘하의 7천 병력으로 조선을 공격하지만, 어.. 고조선은 꽤나 잘 막아요. 1차전에서 순체 휘하의 선발대 다의 병력을 격파하고, 발해만을 거쳐 왕검성을 포위한 양복의 수군을 격파하고, 그 기세로 순체의 본대를 격파합니다.

잠깐 휴전 협상이 벌어지다가 결렬되고, 이어서 2차전이 벌어집니다.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에서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지만, 왕검성은 굳건합니다.

고조선의 수도가 어딘지는 여전히 분분합니다..

여담으로 한나라 수도는 장안(현대의 시안)입니다. 저때는 길도 없었기 때문에.. 평양까지 가려면 보급이 개차반일텐데..?

일단 교과서에서는 평양성으로 배웁니다.

근데 몰라요, 요령이었다가 연나라에서 얻어터지고 평양으로 옮겼다가 연나라 망할때 다시 옮겼거나..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8. 우거왕 암살, 이후 성기가 항전하나 우거왕의 아들이 성기를 죽이도록 함

정공으로 안 뚫리니 이간계를 사용합니다. 우거왕을 암살했아요.

근데 이번에는 성기가 항전합니다. 우거왕의 아들을 이용해서 성기도 죽여버립니다.

여기서 좀 이상한데,, 자기 아버지가 암살당했는데 한나라 뜻을 따르다니

아마도 고조선 왕실 간의 결속력이 모자람(혹은 한나라 측의 날조)일 듯 합니다.

아쉽게도 중국 측 사료라 100% 믿을 수 없으니..

 

9. 한사군을 세움

이후 한나라는 한사군(낙랑, 진번 ⇒ 대방, 임둔, 현도)을 세우지만,,

관리의 어려움, 토착민의 저항, 고구려에게 털림 등으로 나중가서는 낙랑군으로 통합되게 됩니다.

 

한사군의 위치는 이 정도가 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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