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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한국사

고대 국가의 설화

by 길냥이 2025.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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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삼국시대란?
  2.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설화
  3. 백제의 건국설화
  4. 신라의 건국설화
  5. 가야의 건국설화

 

1. 삼국시대란?

삼국시대란, 고구려/백제/신라가 기원후 400~650년간 한반도에서 세력다툼을 하던 시기입니다.

물론, 완전히 저 3개 국가만 존재했던 건 아니에요. 부여라던가, 가야라던가... 그 이전으로 가면 예맥이나 동예나 삼한이나..

즉 실제 삼국시대는 562년에 가야가 멸망하고, 668년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때의 106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이 시대를 말한다는 거에요.

원본 링크 : 국가지도집

 

여담으로.. 이 사진을 보면 이후 나오는 설화가 이해가 되실 거예요.

낙랑이 왜 빨간색이냐고요? 그야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가 아니거든요.

우리나라의 고대 국가는 부여에서 이어진 국가와 고조선-진을 통해 이어진 국가로 나누어지는데..

백제는 사실 부여계와 고조선계의 합(백제국+마한)으로 이어진 국가라 마한을 추가하는 것도 가능했는데.. 삼한은 아무것도 안 나와 있으니 그냥 저걸로 합시다.

 

그리고, 고대 국가의 땅이 넓다 안 넓다로 말이 많은데, 고대국가는 영역국가라기보다는 점국가(여러 개의 점, 성/도시로 이루어진 국가)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강역을 추측하기 어려워요. 그나마 있는 강역도 점령 중인 성들을 바탕으로 추정한 거죠.

 

2.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설화

자, 부여에 대해 알아볼까요..

부여(기원전 200~기원후 494)는 중국사에도 등장한 국가예요. 연나라와 이웃하고 있죠.

이번에도 또 나오는 역사서 『상서대전』에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27번 각주 2번

 

라고 적혀 있습니다. 해석하자면..

해동에 있던 모든 오랑캐들은 모두 부여의 족속들이다

네요.

 

이거 말고도 조금 더 있는데, 『삼국지( 三國志)』의 『위서(魏書)』 의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의 6번째 목차 『부여전(夫餘傳)』 에 나와 있습니다. 20번째 문단을 통째로 가져오면..

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戶八萬,其民土著,有宮室、倉庫、牢獄。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平敞。土地宜五穀,不生五果。其人麤大,性彊勇謹厚,不寇鈔。國有君王,皆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邑落有豪民,名下戶皆為奴僕。諸加別主四出,道大者主數千家,小者數百家。食飲皆用俎豆,會同、拜爵、洗爵,揖讓升降。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在國衣尚白,白布大袂,袍、袴,履革鞜。出國則尚繒繡錦𦋺,大人加狐狸、狖白、黑貂之裘,以金銀飾帽。譯人傳辭,皆跪,手據地竊語。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為奴婢。竊盜一責十二。男女淫,婦人妬,皆殺之。尤憎妬,已殺,尸之國南山上,至腐爛。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兄死妻嫂,與匈奴同俗。其國善養牲,出名馬、赤玉、貂狖、美珠。珠大者如酸棗。以弓矢刀矛為兵,家家自有鎧仗。國之耆老自說古之亡人。作城柵皆員,有似牢獄。行道晝夜無老幼皆歌,通日聲不絕。有軍事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為凶,合者為吉。有敵,諸加自戰,下戶俱擔糧飲食之。其死,夏月皆用氷。殺人徇葬,多者百數。厚葬,有槨無棺。

출처 : 다빈치

으앙 길어요..

그래서 중요부분만 해석하자면..

부여는 은나라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국가 내에서 대회를 열고, 여러 날 동안 먹고 마시며 노래와 춤을 즐긴다. 이를 영고(迎鼓)라 하며, 이때에는 형벌을 중지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
부에서는 흰옷을 선호하며, 흰 천으로 큰 소매의 옷을 입고,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으며, 가죽 신을 신는다.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보셨을 부여의 제천 행사 영고와,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백의민족이 이 부여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외로 부여도 우리 민족에 끼친 영향이 커요, 한국사에서는 부여가 있었다.. 정도로만 배우지만..

 

그렇다면 이제 부여의 건국설화를 알아봅시다. 

논형(후한시대의 왕충이 지음)의 2권 길험편에 부여의 건국설화가 있는데.

논형(論衡)』2권 길험

북이(北夷) 탁리국 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니, 시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로 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우리에 던져두었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으니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두어 말이 밟아 죽이도록 하였으나, 말이 또한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天子)인가 여겨, 그 여자가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에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풀어버리니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동명의 어머니가 처음 임신했을 때, 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고, 버렸으되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성장하자 왕이 죽이려 함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었다. 이는 천명이 그 죽음을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돼지와 말이 목숨을 구해줘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된 것이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는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동명왕신화

Q. 탁리국이 어디예요?

A. 몰라요, 부여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추론은 하고 있습니다.

 

자, 보시면 물고기와 자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뭔가 고구려 건국 설화와 유사합니다. 비교를 위해 들고 와보자면..

금와(金蛙)가 (동부여(東扶餘)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금와 왕은)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에게 사정을 물어보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어느 날 여러 동생들과 놀러 나갔는데, 이때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면서 웅심산(熊心山) 아래에서 저를 유혹해 압록강 변의 집에서 그와 사통(私通)하고는 곧바로 가 버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중매 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금와 왕이 이를 이상히 여기고 그녀를 궁실 가운데 깊이 가뒀는데, 햇빛이 비춰 몸을 움직여 피하여도 햇살이 따라와 그녀를 비췄다. 이로 인해 임신하여 하나의 알을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만 하였다. 왕이 이를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는데 모두 먹지 않았고, 다시 길가에 버렸지만 소와 말이 이를 피하였다. 이후에 알을 들에다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품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 하였지만 깨트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알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영특하고 잘생겼다.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이를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를 이름으로 삼았다.
금와 왕에게는 7명의 왕자가 있어 항상 주몽과 어울려 놀았지만, 그 재주가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장자(長子) 대소(帶素)가 금와 왕에게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고 그 사람됨이 용맹하니 일찍 도모하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까 걱정됩니다. 청컨대 제거하십시오.” 왕은 듣지 않고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은 그중에서 준마를 알아보고 먹이를 줄여 야위도록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웠다. 왕은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이후 왕이 들판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쏘므로 그에게 화살을 적게 주었지만 그가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료가 다시 주몽을 죽이고자 모의했는데,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몰래 알고 말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이라면 어디에 가든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보는 것보다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주몽은 이에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벗을 하고 길을 나서 엄호수(淹淲水) 【일명 개사수(盖斯水)로 지금의 압록 동북쪽에 있다】에 도착하였는데, 이를 건너고자 하였지만 다리가 없었다. 주몽은 추격병이 가까이 올까 걱정하고 엄리수에 말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다. 오늘 도망치고 있는데 추격자가 다가오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이내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격하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은 모둔곡(毛屯谷) 【위서(魏書)에서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러 3명을 만났는데, 제각기 마의(麻衣), 납의(衲衣), 수조의(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어보았다. “그대들은 어디서 온 사람이고 이름이 무엇이요?” 마의를 입은 자는 이름을 재사(再思)라고 하였고, 납의를 입은 자는 이름을 무골(武骨)이라고 하였고, 슈조의를 입은 자는 이름을 묵거(默居)라고 하였는데 성(姓)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들에게 극씨(克氏)⋅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설씨(少室氏)의 성을 만들어 주었다. 이에 주몽이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제 하늘의 크나큰 명을 받들어 나라의 기틀을 열고자 하는데, 여기 3명의 현인(賢人)을 우연히 만난 것은 어찌 하늘이 내려 준 것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헤아려 각기 임무를 주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 【『위서』에는 홀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산하(山河)가 험하고 견고하여 마침내 도읍으로 삼고자 하였지만,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고 고(高)를 성으로 삼았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이건 더 기네.. 아무튼 원본은 『삼국사기』13권,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전입니다.

 

좋아요, 이걸 보면 물고기와 자라.. 왕의 시비의 임신(간통).. 난생설화.. 등등이 굉장히 유사합니다.

잠깐, 그래서 왜 하필 알인가요?

ㄴ에 대해서 답변해 드리자면, 하늘에서 내려온 알입니다. 뭘 의미할까요?

ㄴ어.. 태양? 

ㄴ그렇습니다. 고대 국가는 태양, 바람, 하늘 등 자연을 숭상했는데, 그러한 마음가짐이 이렇게 건국설화에 투영되게 되었답니다. 

 

뭐, 이를 통해 알이 나온 설화가 전부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물론 이것들이 전부 거짓은 아니고.. 건국설화다 보니 건국시조의 신성성과 능력, 혈통을 강조해야겠고, 그 덕분에 건국시조의 신비한 능력과 재능이 높고, 이런 사람이 우리 국가를 세웠다! 해서 국가를 결속시키는데 도움을 주는데.. 

 

사실 진짜 재미있는 점은 저게 삼국사기, 그러니까 1000년가량 지난 시점의 설화라는 겁니다.

진짜 고구려의 설화는 광개토대왕릉비(414)에 적혀있어요.

대왕릉비의 맨 위를 발췌해 오자면..

옛적에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개창하였다. [추모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는데,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강림하였으니, 탄생하면서부터 성스러움이 있었다. … 수레를 출발시켰다. [추모왕이]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경유하였다. [추모]왕이 나룻가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입니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추모왕의] 음성이 떨어지자마자 곧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였다. 그러한 다음에 [엄리대수를] 건널 수 있었다.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추모왕이] 세속의 왕위를 기꺼워하지 않으니, [천제가] 황룡을 보내니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천상(天上)으로 올라갔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짜잔, 이게 진짜 고구려의 건국설화예요.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지도 몰랐기에, 이게 정설이 맞습니다.

 

Q. 그래서, 왜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부여의 건국설화가 비슷한가요?

A. 그건 고구려의 배경(지도 참조)에 원인이 있는데, 고구려는 부여의 유이민 세력이 세운 국가예요. 

근데 부여는 346년 전연의 공격으로 개박살이 나고 망하고, 이후 북부여와 동부여로 토막나는데.. 이건 패스하고

이후 고구려에 소수림왕(~384)이 등장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데, 이때 부여의 설화를 차용해 온 거예요.

 

요약하자면, 고구려가 "우리도 부여인인데 좀 나눠 씁시다" 한 거죠.

 

3. 백제의 건국설화

이 설화는 유일하게 알이 나오지 않아요. 그 이유는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본질적으로 백제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국가이기 때문이에요. 부여도 알이 나오고, 고구려도 알이 있으니 굳이 여기서는 알이 필요 없다는 거죠.

 

아무튼, 백제는 미추홀(인천)과 위례성(서울) 인근에 세워졌어요. 그래서 백제의 건국 설화는 비류 신화와 온조 신화로 나누어지는데, 온조 설화만 보자면.. 『삼국사기』 권 23 『백제본기1 온조왕에 나와요.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弥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출처 : 다빈치

 

온조왕 즉위년 조에 의하면, 온조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으로,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와서 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였다. 얼마 뒤에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비류이고 둘째가 온조였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았던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와 비류는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 한산(漢山)에 이르렀고, 이곳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 18)이다. 비류는 십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미추홀(彌鄒忽)에 가서 거주하였는데,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살 수 없었으므로 위례성으로 돌아와 살다가 죽었다. 그 뒤 온조는 백성이 날로 즐겁게 따르므로 국호를 백제라고 하였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로써 성씨를 삼았다. 

 

근데 고구려에서 왜 그렇게 멀리 떠났을까요?

글세요, 내전이 한번 일어났나...

 

뭐,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낙랑이 평양 지역에 존재했어요. 편의상 낙랑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한사군이죠.

한사군은 중국에서 세운 군현이고, 부여의 민족들은 중국 민족이 있는 국가 근처에 살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한사군의 영향력이 미약한 곳에 정착했답니다.

뭐, 그래서 백제의 국호가 남부여일 때도 있고, 백제의 사비가 현 부여인 이유기도 하죠.

 

4. 신라의 건국설화

이쪽은 고조선의 유이민(준왕) 세력이 세운 국가예요. 여기도 알이 나오는데.. 

여긴 왕이 셋이에요. 박혁거세와 김알지, 석탈해

신라 초기에 박 석 김씨가 왕위를 돌려썼다는 것으로 알 수 있죠.

 

뭐, 원문을 가져오자면.. 이번에도 삼국사기예요.

『삼국사기』 권 1 『신라본기 1 혁거세에 나와요.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출처 : 다빈치

 

신라의 수도가 되는 금성(경주) 지역은 6명의 촌장이 다스리는 땅이었다. 어느 날 이 6개의 촌락 중 고허촌의 촌장인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보았는데, 나정이라고 불리는 우물 옆에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가 보니 말은 찾아볼 수 없고 표주박 만한 알이 하나 있어 깨뜨려 보았다. 알에서는 남자아이가 나왔고, 소벌공은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 자식처럼 키우다가 어느새 아이가 10세가 넘자 어른처럼 성숙해졌다. 이 아이의 이름은 혁거세였고 표주박 같은 알에서 나왔다 하여 박(朴)씨를 가지게 되었다.
6촌의 사람들은 이 일을 신기하게 여겨 아이가 장차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보았고, 혁거세를 받들어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5. 가야의 건국설화

아쉽게도, 가야는 삼국사기가 쓰일 때 근본 없는 국가여서 정사에는 없어요.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존재하죠. 그 전문을 가져오자면...

문종(文宗)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金官) 주지사(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은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백 호로서 7만 5천 명이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은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②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년)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여러 마리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그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빛 상자가 있었다.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며 함께 수없이 절하였다. 얼마 뒤에 그 알을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그 후 12시간이 지난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었다. 여섯 알은 모두 여섯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으니 여러 사람들이 축하하며 절하고 정성을 다해 공경하였다.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곧 은나라 천을(天乙; 은나라 탕왕)과 같았고, 얼굴은 용을 닮아 한(漢)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8채로 요(堯)임금과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곧 우나라 순(舜)임금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하였다.
또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가서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바다,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왕은 임시로 대궐을 짓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소박하고 검소하여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 정월(43년)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도읍을 정하려 한다.”라고 하고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으로 나가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고 좌우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땅은 여뀌 잎처럼 좁고 적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일곱을 이루니, 일곱 성인이 살 만한 곳으로 이곳이 가장 적합하다.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해서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이곳에 1500보 둘레의 성곽과 궁궐, 전각 및 여러 관사, 무기고,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하였다. 일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두루 나라 안의 장정, 인부,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집들은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그해 10월에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야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궐로 들어가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흠.. 좋아요.

 

가야의 건국설화는 다른 국가의 건국설화와 다른 점이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우리가 가장 먼저 왕을 청했다"와 "알이 여섯 개"가 있죠.

 

사실 이건 국가가 약해서 그래요. 국가가 약해서 신화를 통해서 국가의 강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거죠.

당연하게도 가야가 가장 먼저 왕을 칭하지는 않았으며, 알이 여섯 개인건 다른 국가의 설화들과 비교해서 알 개수에서 이기려고 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이건 좋지 않아요. 왕은 유일한 자리고, 저렇게 알이 여섯 개가 나오면 왕도 여섯 명이고.. 

이건 중앙집권도 안 돼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미천한 천하인이 천상인 여섯 명 중 한 명을 선택한다는 의미 또한 됩니다.

 

뭐. 이런 건 여러 가지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는 해요. 실제 국력이 강한(대표적으로 고대 중국) 국가일수록 신화는 간단해지고, 실제 국력이 약한(대표적으로 고대 일본) 국가일수록 신화에 신들이 늘어나요.

 

중국은 그냥 거인 (반고)

한국은 신 (환인)

일본의 신은... 너무 많아요 (니니기, 아마테라스, 이자나기, 이자나미, 야타가라스, 사쿠야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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