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고구려의 성립
- 백제의 성립
- 신라의 성립
- 가야의 성립
고구려의 성립
대략 그러니까 저 시기 이전, 고구려가 세워질 적에 비류수(沸流水) 상류에 비류국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주몽(동명성왕)은 저 비류국의 왕 송양에게 대결을 신청하는데..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본기』 1 동명성왕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으니..
王見<沸流水>中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출처 : 다빈치
임금이 대답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
이에 송양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노릇을 하였고, 땅이 작아서 두 왕을 용납하기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리에게 부용(附庸)함이 어떠한가?”
임금은 그 말에 분노하여 그와 말다툼을 하다가 서로 활을 쏘아 재주를 겨루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뭐, 설화를 해석하자면 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송양이 세운 비류국 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송양은 탈탈탈 털린 것이 맞습니다.
이후 저 비류국은 고구려의 5부 중 하나인 연노부(涓奴部)로 편입되니, 고구려가 건국하여 주변 국가와 싸워서 승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성장이 정체되는데, 이유는 고구려의 지리적 특징 때문이에요.
이전에 부여가 전연에게 털린 건 알죠? 그것처럼 중국 세력의 견제 및 공격이 들어오는데, 그런 것을 막기 위해 한사군(낙랑 등)의 눈치를 봐야 하지요.
하지만 이런 고구려가 급성장하는 계기가 나오니, 그것이 기원후 9년, 전한(前漢)이 무너지고 왕망의 신나라가 세워진 사건입니다.
물론 이 신나라는 기원후 25년에 후한(後漢)이 등장하면서 망하지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대략 50년가량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 동안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5부족연맹체를 중앙집권화시켜 예속시키니, 중국을 두들겨 패는 고구려의 강력함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백제의 성립
아쉽게도, 근처에 견제할 세력이 한사군 정도밖에 없던 고구려와는 다르게 백제는 근처에 강력한 세력이 많았어요.
대표적으로 북쪽의 한사군, 남쪽의 마한 등이죠.
이 둘이랑 싸우며 성장하려기엔 백제는 답이 없으니, 한쪽을 선택하게 됩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중국의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공손도와 백제가 결혼동맹을 맺었다는게 나오지만, 어.. 이건 딱히 신빙성이 의심되어요. 공손도가 저 백제랑 동맹해서 얻을 이익이 뭐가 있나요?
마한이랑 전쟁하기? 그건 저 밑의 낙랑군이 처리할 일인데?
삼국사기에 적혀있으니 정사라고요? 김부식은 그냥 북사랑 수서를 보고 쓴 거예요. 만약 이게 맞다면 백제는 부여 세력과 중국 세력의 결합으로 탄생하게 되는데(비류신화) 이건 온조신화랑은 조금 다르기에...
그리고 한 가지 더, 『북사』 에는 백제에 관련된 기록이 없어요.
하지만 중국 세력과 백제가 손을 잡은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에요.
대표적으로 한사군이 낙랑으로 통합되고,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한 것처럼 말이죠.
뭐, 요약하면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받은거에요. 천연 항구인 한강 하구 유역이 있으니 중국과 쉽게 교역하고, 바로 위에 있는 낙랑과도 교역할 수 있으니 강력하게 성장했겠죠.
이후 『삼국지( 三國志)』의 『위서(魏書)』 의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의 11번째 목차 『한전(韓傳)』 의 45문단을 보면..
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출처 : 다빈치
짜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아, 중요부분만 해석해 드리자면...
"환(桓)과 영(靈) 제의 말기에 한회(韓濊)가 강성해져, 군현(郡縣)으로는 이를 제어할 수 없었고, 많은 백성이 한나라로 이주했다."
두 군은 결국 한(韓) 나라를 멸망시켰다."
입니다.
근데, 뭔가 이상해요. 한나라, 그러니까 삼한, 아니면 고구려가 망했다면서요? 아무것도 안 망했는데?
어음.. 실제로 비슷하게 일어났던 전쟁이 있는데.. 그건 고구려(동천왕)와 위(관구검)의 전쟁이에요.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수도까지 탈탈 털립니다.
근데 문제는, 이건 244년에 일어났던 전쟁이에요. 환제와 영제 시기는 영제(168~189)인데.. 저건 너무 격차가 심해요.
그래서 가장 가능성 높은 추론은, 마한이 저 전쟁에서 망했다는 거예요.
이전에 한번 말했죠? 고구려가 마한에서 전해졌다고 고대인이 생각한다는 거요.
그래서 그 시대 역사가들은 마한이 털렸다 = 고구려가 털렸다 로 여겼다는 거예요.
따라서, 실제로는 마한이 망하고 그 털린 마한을 백제가 흡수하면서 성장했다는 말이죠.
여담으로, 저 공손한 공손가문은 공손연-공손도-공손강-공손연으로 이어져서 한국사에 자주 등장한답니다.
신라의 성립
흠.. 신라를 보면 지형적으로 소백산맥과 낙동강이 자연방벽이 되어 줘요. 내부에서 성장을 방해받지 않았겠죠.
하지만 단점도 있으니, 한반도 구석탱이라 선진문물을 받기 어려워요. 그래서 보통 고구려에게 수입해 왔는데..
박혁거세가 서라벌을 건국하고 거서간이 된 뒤에(기원전 57년) 이후 석탈해 이사금이 즉위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포상팔국의 난을 제압하는 결과 가야를 세력권에 넣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왕 3명(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들이 이어지면서 마한이랑 자주 싸웠다고 나오는데..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고려해 마한은 사실 변한(가야) 일 가능성이 높아요.
포상팔국의 난은 가야 편에서 설명하죠.
가야의 성립
가야.. 가야는 연맹왕국이었어요. 중앙집권하지 못했죠.
수로왕과 석탈해의 이야기를 보면, 석탈해가 수로왕에게 졌다고 나오는데...
실상을 고려하면 수로왕이 털린 것을 알 수 있어요.
가야가 중앙집권으로 나아가던 시기, 가야의 국가들은 철을 통한 무역을 통해 성장했어요.
낙랑으로부터 선진 문물도 받고...
그런데 이때, 소외된 포상팔국이 모여 가야에게 전쟁을 일으키니, 바로 포상팔국의 난입니다.
만약 이걸 가야가 제압했다면 가야는 성공적으로 중앙집권에 성공하고, 삼국시대는 사국시대로 불렸을 것이에요.
하지만 역사에는 만약이란 없고, 가야는 털리고 신라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신라는 구원병을 보내 8ㄷ1 싸움에서 포상팔국을 털어버리고,,
가야 지방에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그냥 속국화된거에요.
이후 신라는 가야의 철과 가야의 교역으로 얻은 선진 기술을 바탕으로 강성해지고, 소백산맥 등의 자연 방어선을 통해 마한의 압박을 저지하면서 세력 확대에 나섭니다..